"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읽고
이순신 및 임진왜란과 관련된 서적과 유적지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난중일기 및 오고 가는 서신 등 자세한 기록들을 통해 나타나는 이순신의 정신세계 및 리더쉽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특별히 끌리는 책이다.
당시 실록이나 이순신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하여 책으로 만들어 놓았던 20여권의 참고문헌을 토대로 주관적이거나 허구적인 내용보다는 가능한 기록에 나온 내용들에 근거해서 한 권을 이루었다는 면에서 어느 사극의 내용보다 가치가 있어 보인다.
40여년전 젊은 시절 이순신에 대해 매력을 느껴 약 10여년 전부터 책을 내고자 다짐하고 수많은 관련자료를 읽고 모으면서 바쁜 공직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내서 이런 종류의 책을 낸다는 것이 요즘 번갯불에 콩을 볶듯이 뚝딱뚝딱 책을 만들어 내는 것과 확실히 비교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7년 7개월동안 조선수군으로서 전투 이야기가 핵심이지만 그 외 이순신의 일대기, 충효사상, 국가관, 가족사랑, 대인관계 그리고 리더쉽 등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정치적인 상황이나 백성 및 관리들의 삶을 통해 같은 땅 위에서 2012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그 때보다 낳은 삶은 살 수 있는지 정신적인 가르침을 주기에 충분한 책인 것 같다.
이순신은 서울 남산 북동쪽 비탈아래 건천동에서 성실, 강직 그리고 공명정대를 가풍으로 삼는 덕수이씨 가문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가풍이 뚜렷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운 가풍대로 사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었나 보다. 율곡 이이도 이 집안 출신인 걸 보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은 그 만큼 중요해 보인다.
학문을 하고 벼슬을 하는 걸 가장 큰 업적으로 치던 시기였기에 이순신도 가난한 가정 형편이지만 유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결혼 이후 22세 때부터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무관(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병서를 읽고 시험준비를 한다. 이는 서울 건천동 집 앞에 훈련원이 있어 어렸을 적부터 군인들을 보고 자라 이에 영향을 받은 듯 싶다. 나중에 작성한 그의 시나 일기의 내용을 볼 때 문과 시험에 응시해서 문신의 길로 갔어도 또 하나의 인생이 되었겠지만 무관의 길로 간 것은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한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무과 시험이 쉬었던 것 같지도 않다. 이순신은 청렴함을 바탕으로 살고 외부 인맥을 전혀 이용하거나 요령을 부려 벼슬길에 나가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만 시험에 응시한다. 몇 차례 낙방한 후 32세(1576. 2월)에야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식년무과에 합격한다. 다리가 부러져 버들가지로 상처를 싸매고 다시 말에 올라 시험을 마쳤지만 시험에 낙방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는데 낙방이라도 완주를 한 부분은 이후 이순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당시 낙상이 작은 외상이 아닌 사람이 죽을 정도의 상처이었다고 하니 …
군인이 된 이후에도 청렴함과 원칙주의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며 매사에 정성을 다해 업무에 임하지만 요샛말로 대인관계에서 융통성이 부족하여 공직생활 중 3번의 파직과 2번의 백의종군을 겪게 되는데 이는 모두 장군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아주 작은 문제로 시기하고 모함해서 생긴 결과들이라고 유추 해석이 된다.
승진을 하여 부하들을 이끌 때에도 한결같은 원칙주의 모습을 보여 시간이 흐를수록 부하들은 장군의 뜻을 알아보고 잘 따른다.
군인이 된 이후 23년 동안 다음과 같은 길을 걷는다. (음력 기준)
- 32세 : 1576. 12 ~ 1579. 2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 종9 품 )
- 35세 : 1579. 2 ~ 1579. 10 서울 훈련원 봉사 ( 종 8품 )
- 35세 : 1579. 10 ~ 1580. 6 충남 해미 충청병사 군관 ( 현재 해미읍성)
- 36세 : 1580. 7 ~ 1582. 1 전남 고흥 발포 수군 만호 ( 종4품) / 파직
- 38세 : 1582. 5 ~ 1583. 7 서울 훈련원 봉사 ( 종8품 복직 )
- 39세 : 1583. 7 ~ 10 함경도 북청 남병사 군관
- 39세 : 1583. 10 ~ 11 함경도 끝 건원보 권관
- 42세 : 1586. 1. 서울 사복시 주부 (종6품 )
- 42세 : 1586. 1 ~ 1588. 6 함경도 끝 조산보 만호 (종4품) / 녹둔도 둔전관 ( 첫번째 백의종군 및 복직 )
- 45세 : 1589. 2 ~ 12 전주 전라감사 군관 (종4품) 겸 조방장
- 45세 : 1589. 12. ~ 1591. 2 전북 정읍 현감 (종6품) / 태안현감 겸직
- 46세 : 1591. 2 ~ 1593. 7. 15 여수 / 전라좌수사 (정3품 ) /
- 49세 : 1593. 7. 15 ~ 1597. 2. 26 통영 한산도 / 제1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 전라좌수사 겸무
- 53세 : 1597. 2. 26 ~ 3. 4 파직, 한양 압송
- 53세 : 1597. 3. 4 ~ 4. 1 한양 의금부 감옥살이
- 53세 : 1597. 4. 1 ~ 4. 27 출옥, 백의종군, 남해안 이동
- 53세 : 1597. 4. 27 ~ 6. 4 전남 순천 / 백의종군
- 53세 : 1597. 6. 4 ~ 8. 3 경남 합천 초계 / 백의종군
- 53세 : 1597. 8. 3 ~ 경남 진양(지금의 진주/사천 부근) 제3대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명장 수령
- 53세 : 1597. 10. 29 ~ 1598. 2. 17 전남 목포 고하도 / 삼도수군 통제사
- 54세 : 1598. 2. 17 ~ 1598. 11. 19 전남 완도 고금도 / 삼도수군 통제사
l 1598.11.19 : 완도기지에서 노량으로 이동하여 조명-연합군과 vs 왜군과 전투 중 사망 및 그날로 8년 전쟁종료
위 여러 곳에서 근무할 때 품계에 연연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 앞에서는 상관에게도 원칙외 양보하려고 하지 않아 칭찬보다는 미움을 많이 받고 파당을 이룬 정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한다. 아래 사람들에게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고 원칙대로 함으로써 당장은 돋보이는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났을 때는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업무의 특징이 순수 군인으로서 적의 노략질과 전쟁에 대한 대비/훈련이 주 업무이었기에 지금 당장 적의 칩입이 없다고 해서 적당히 근무하는 게 아니라 실제 적이 눈앞에 왔다고 가정하고 전쟁/업무를 준비하는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무대나 직업을 갖은 보통 사람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표본이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원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인물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국민성이 대략 어떠했는 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노력이나 용기로 세상을 헤쳐 나가기 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상대를 깍아 내리거나 가지고 있는 대인관계를 이용하여 나의 입장과 상반되는 사람들을 깍아 내리거나 모함하려고 하는 것은 물질문명이 크게 발달한 요즘이나 그때나 크게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요즘도 여럿이 이야기하다가 한 사람이 자리를 뜨면 그 자리를 뜬 사람의 결점을 찾아내어 논점으로 삼고 계속 이야기 하는 모습은 크게 고쳐야 할 부분이다. 미국 사람들과 업무를 하면서 느낀 점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자리를 뜬 사람을 칭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단점이 있어도 그 걸 밝이기 보다는 그 단점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 우리와 좀 다른 것 같다.
정파를 나누어 그 정파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툴 수는 있지만 그 이익이 국가와 백성의 이익과 달리 한다면 적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서 충분히 배워야 한다. 이후 병자호란이나 일제강점기와 같은 아주 큰 사건이 시간을 두고 다시 다가오는 걸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과 또 일반 백성/국민들의 이 배움에 대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 기본이 어디에 있어야 할 지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할 대목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시작되는 무렵인 1592년 초부터 일기를 많이 썼다고 한다. 매일 일기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인물됨을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전투가 있을 때에도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등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썼다. 내용을 보면 누구를 크게 악평하는 내용도 별로 없다.
멀리 있는 가족과 떨어져 살고 또 지금처럼 친구를 자주 만나는 그런 삶이 아니었으므로 오직 일기만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이자 자신을 이끌어 주는 방향 지시등이었으리라. 그 일기(국보 76호)와 각종 서신, 조정에 보고서 등이 오늘날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후 1592년 4월 13일(음)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일본의 정병 30만명의 군인들이 조총으로 무장하여 부산항에 도착하고 이어 부산진성, 다대포, 동래성 등을 하루 이틀 사이에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선조 임금을 잡으러 올라가는데 중간에 변변한 싸움 한번 없이 경상병사, 경상좌우수영의 군인들은 왜군의 기세에 질려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쳐 버린다.
그 원인이 조선건국 이후 국가간 전쟁이 없었고, 문신이 대접 받던 시대이고 또 문신이 고위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던 시대라 할지라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건 일본(왜)의 판단력이 보기 좋게 들어 맞은 경우이다. 불과 20일만인 5월 3일 한양이 점령당한다. 옛날 걸어가도 한 달씩 걸린다던 거리를 전쟁하면서 20일만에 간다는 건 너무 심하다. 얼마나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는지 국가와 군인들이 이 부분을 제껴놓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법률, 재정, 국방, 외교 등은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의 운영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인데 당시 왕이나 정치인들은 확고한 신념없이 너무 관례적으로 업무를 보지 않았나 싶다. 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하고 정파를 만들어 국가의 이익이 아닌 자기 파당 세력이 유리한 쪽으로만 이끌려는 붕당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와 백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자존심보다는 큰 그림을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조선 건국 이래로 훈구파 vs 사림파 ( 영남학파, 기호학파 ), 동인 (남인 vs 북인 (소북 vs 대북)) vs 서인 (노론 vs 소론) 등으로 갈라 악성적으로 싸우는 모습은 나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서로 죽이며 싸우는 악순환의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군왕이 가운데서 중재를 해야 헸지만 중재를 하지 못할 때에는 그저 세력다툼 외에는 그 목적성과 방향성이 없는 것 같아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쓸쓸하기만 하다. 현재의 정치에서도 보수와 진보 정당으로 나누어 경쟁을 하는데 국가의 안정과 발전보다는 정파의 이득을 더 위하여 싸워 이기려고만 한다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또 일제 강점기와 같은 침략이 언제든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 부분 모든 위정자와 일반 국민들이 한번씩 생각해 볼 부분이다.
천만 다행스런 것은 왜(일본) 육군 선발대가 5월 3일 한양을 점령할 때 이순신은 1년 2개월 동안 전라좌수영에서 열심히 근무하면서 거북선도 만들고 전쟁에 대한 준비를 어느 정도 마쳤던 시기이다. 다른 육군이나 다른 수군이 어떻게 하든지 말든지 전라좌수영은 이순신의 지시 아래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아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반 정치인과 군인들이 이순신의 그와 같은 준비를 은근히 비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 일도 없는데 나랏돈 써가며 뭐 하는 짓이냐고 ....미친 거 아니냐고...
드디어 판옥선 (개량된 군함이라고 보면 될 듯.. ) 24척을 이끌고 전라좌수군은 1592년 5월 4일 여수 좌수영을 출발하여 경상도 앞바다로 향한다.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은 그 많던 판옥선을 불태웠는지 수장시켰는지 아니면 적에게 패퇴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게 만든 것도 그의 잔수인 지 모르겠다. ) 판옥선 겨우 4척(원래 편제상 20척 이상이어야 함 )을 이끌고 나타나서 전라좌수군에 빌붙는 형태를 취하고 왜 수군과 처음으로 거제도의 옥포에서 첫 전투를 벌이고 통쾌하게 승리를 한다.
승리의 기저에는 이순신의 준비된 전략과 전술 그리고 총통(대포)과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무기가 왜수군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원인이 되며 이후 크고 작게 싸울 때마다 이기게 된다. 저 유명한 한산도 대첩도 조선수군(전라좌.우수, 경상우수군 연합)이 이순신의 주도 아래 일본 정예수군을 무참히 깨뜨린 전쟁이다.
임진왜란 전체적으로 이순신 전라좌수사/삼도수군통제사 주도 23전 23승,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주도 1전 1패
조선수군이 승리를 계속하게 됨에 따라 일본 수군이 전라도 쪽으로 못오게 하는 전략에서 바꿔 이제는 적의 본 기지가 있는 부산항을 압박하는 전략으로 바꾸기 위해 본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게 된다. 한양을 지나 개성, 의주, 평양까지 갔던 일본 육군은 수로를 통한 보급이 끊기게 되고 조명 연합국과 왜 간의 강화조약 문제가 대두되어 약 3년 8개월 동안 큰 전투없이 지내게 되고 왜군들도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한쪽 구석에서만 지내고 일부는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
전쟁이 없는 3년 8개월 동안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판옥선을 더 만들어 180척까지 세력을 더 키운다. 한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종 요구조건 ( 일본을 왕국으로 인정하고 조선 4도를 일본에게 주는 문제)이 무산됨에 따라 토요토미는 1597년 다시 15만 대병을 추가로 조선에 보내게 되는데 … 그 이전 이순신보다 5살이 더 많은 원균은 이순신의 독주가 미웠던지 술이나 먹고 나이 적은 상관을 제대로 받들지도 않으면서 중앙정치무대의 윤두수(정승)를 비롯한 동인 정치인들의 세력을 이용해 이순신이 왜군과 내통하고 있고 또 왜군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누명을 씌워 역적으로 몰아 그를 파직시키고 자기가 통제사가 되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사형까지 명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통제사 자리를 꽤 찬 원균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힘들게 만든 180척의 판옥선과 그 많은 수군들을 왜군들에게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원균 그 자신의 목숨도 잃어버리고 만다. 통제사(지도자) 한 명의 자리가 이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
아! 전선 한 척도 수군 한 명 없는 삼도수군통제사 자리 복직 ! 그리고 뒤에는 맹수처럼 쫓아오는 일본 수군과 육군들…이번에는 일본군들이 전라도 쪽을 목표로 하여 쫓아온다. 이 막연한 현실 앞에서도 이순신은 좌절하지 않고 사람 하나 전선 하나를 끌어 모아 왜군과 마지막이 될지 모를 싸움을 준비한다.
드디어 전라우수영이 있는 해남 명량(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여 겨우 12척의 판옥선으로 왜군 배 400척 중 133척과 맡붙어 통쾌하게 이기게 된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뒤쳐저서 이 전투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왜군들은 이야기만 듣고도 여수 부근까지 도망간다. 이순신이 무서워서다.
전세계 해군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고 한다.
이후 강화가 진행되는 시기에 조선수군은 군사의 수와 판옥선을 늘리게 되고 또 명나라에서도 수군을 파견한다. 조명연합 수군이 계속 밀어붙이는데 1598년 8월 18일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후계없이 죽게 되어 왜군들이 전부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이 압박해옴에 따라 왜군은 퇴각마저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가 1598년 11월 19일 노량(현재 경남 남해군) 앞바다에서 연합수군과 일전을 벌이게 되고 왜군 배 450척중 400여척이 파괴되고 약 50척만 살아서 왜로 돌아간다.
이과정에서 이순신 장군도 이날 아침 적탄에 맞아 숨지게 된다.
이로써 7년 아니 8년 가까이 계속된 전쟁은 끝이 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1636년까지 약 38년 동안 짧은 평화기가 도래한다. 이걸 과연 평화라 할 수 있을 지….
나라에 힘이 없으면 힘을 키워야 하고
나라에 힘이 있으면 그걸 더 키울려고 해야지
힘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서로 싸울려고만 한다면
인근 나라가 어부지리로 조개를 가져가듯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라 문제뿐만 아니라
회사, 어느 단체 그리고 가정에서도
싸움 대신 현명하게 대화로 어려움을 해결하려 한다면
전쟁의 피해와 같은 처참함 없이
행복이 뒤따르는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