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이준 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을 읽고

시간을 쪼개서 2013. 7. 17. 17:22

 

 

 

동서고금에 뛰어난 인물이 참으로 많은데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살면서

크게 위용을 떨치고 2천만 국민들을 계몽시키려 했던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본다.

 

3.1 독립운동(1919, 기미년)이 일어나기 60년 전 1859년(기미)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격랑에 빠져들었으며 함경남도 북청군 (함흥에서 북동쪽으로 더 올라 감 )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3세에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와 숙부 아래서 한학을 배우고 12살 어린 나이에 북청 지방관청 시험에 응시하여 1등 합격을 앞두고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된다. 이 사실을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 부당성을 알리는 데서 이준 열사의 올곧은 정신이 살아 이어지며 그 토대에서 인생도전은 이어진다. 이런 정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지며 때론 타의 모범이 되기도 하고 적대세력으로부터 타도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좋아서인지 계속해서 중국고대 선현들의 높은 학식을 익히고 또 그것을 후배들에게 가르쳤으며 당시 동양과 서양의 현실정치를 꿰뚫어 보고 조선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꾸준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열사의 유년시절 한반도의 정세는 철종 말기 및 고종 초기 제위기간으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마무리 되고, 진주에서 민란이 일고, 천주교에 맞서 동학이 창도되던 시기이다. 또 흥선대원군이 고종과 함께 집권을 시작하여 천주교 신자를 8,000 여 명을 죽인 사건도 이 무렵이며 선진국(열강국)들이 무역의 폭을 넓혀 가던 시기로 이 때 프랑스와 미국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조선의 개항과 무역을 요구하던 시기이다.  국내 민생정치와 치안이 안정되지 못하던 시기에 선진국에서 개항요구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안정을 찾기 보다는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일부 진보적인 선각자들이 있었지만 기득권 세력과 타툼으로 의견이 분열되어 국론이 쉬이 하나로 도출되기 어려웠던 시기이다. 물론 조선왕권은 이 복잡함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17살(1875) 때 조선 정치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향하고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그 인물됨을 인정받고 당시 형조판서(지금의 법무부장관+대법원장 정도 ? )이던 김병시 대감의 집에서 기숙과 업무보조를 하는 문객이 된다. 이준은 최익현 대감(1833~1906)을 Mento로 삼고 존경해서 애국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북청에서 친구가 찾아와 김병시 대감의 아들 김용규의 담뱃대를 상민 친구에게 한 번 피워보라고 준사건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커다란 인생 전환점이 되어 버린다.  감히 대감집에서 쓰는 물건을 상민에게 사용하게 했다며 김용규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자 이까짓 담뱃대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 ( 사람있고 물건 있지 물건 있고 사람있냐... )며 오히려 역정을 내고 그 담뱃대를 부러뜨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 문제로 함흥감사 이돈하가 그를 체포하러 왔을 때도 그까짓 문제로 나라에서 벌을 준다면 나라의 법이 제대로 돌아겠느냐며 따져 묻자 함흥감사마져 이에 수긍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열사의 개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후배들을 양성한다고 경학원(학교)를 만들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이때문에 북청지역에서 과거 합격생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배출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31세(1889) 때 김병시 대감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양으로 오게 되며, 35세(1893) 때 김대감이 결혼을 중매하여 17년 연하의 이일정 여사와 재혼도 하게 된다. 

 

갑오경장,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에 입학하게 된다 ( 37세, 1895 ). 이 때부터 이준의 사회생활이 중앙무대에서 꽃을 피운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양반 자제들이 어린 나이에 중앙 정치무대에 나서는 걸 보면 늦어도 한 참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다. 대게의 위인들이 그렇듯이 이준에게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오직 나라의 자주, 독립과 미래 발전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도 만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기(1896)에는 일본으로 피해야 하는 상황도 맞이하며 와세다 대학에서 2년 반동안 법학공부도 하고 오고, 제1회 법관양성소 졸업생이 되며 검사시보로서 생활을 하게 된다. 1897년 조선에서 새롭게 나라이름을 바꾼 대한제국에서 정부조직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잘 이용하자는 기회를 자주 갖었다. 종로사거리에서 군중이 모이는 만민공동회도 개최하여 헌법과도 같은 헌의6조가 만들어지며 수구 기득권 세력과 피할 수 없는 갈등이 도출된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여 역모를 꾸민다는 수구 기득권의 누명 씌우기에 몰려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이 된다.  개혁세력이 역모를 꾸미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수구세력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역모라는 무시무시한 효과를 도입함으로 Power Game에서는 이겼을 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이 나라를 혼란을 빠뜨리는데도 분명 일조했다는 것이고 시대가 바뀐 지금도 이런 일 반복된다는 점이다. 이준은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등과 함께 개혁당을 조직하고 구국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고 적십자사도 설립한다.

 

열사를 비롯한 여러 구국을 위한 젊은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과 제1차 한일협약(46세, 1904)을 맺게 되고 황무지 개척권을 내주게 된다.  일본은 계획대로 뱀이 조금씩 개구리를 삼키듯 조선을 통채로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회를 결성해 일본해 대항도 하지만 유신회(일진회)로 대항하는 일본의 세력을 당해내지 못하며 계속해서 이상설, 이동휘, 이상재와 함께 대한협동회로 저항하다가 감옥살이도 하고 유배도 가지만 고종황제에 의해 석방된다. 아직 고종이 그 정도 힘은 있을 때였다.

 

이후 국민교육운동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려는 계획을 무마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며 교육을 통해 계몽운동도 하고, 헌정연구회를 통해 나라의 헌법과 법률을 만드는 일도 시도했으며 왕실에 있는 사람도 이 법에 따라야만 한다는 취지였다. 이준 세력은 영국의 경우처럼 의회를 통해 법을 만들고 이 법에 황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따르는 입헌군주제로 가는 방향을 잡고 있었는데, 수구 기득권세력은 이는 반역과 같은 안이라며 지금까지와 같이 전제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본과 손을 잡고 진보세력을 탄압한다.

이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해방 이후에야 남한이 이 제도로 바뀐 걸 보면 얼마나 앞을 내다보는 선각자들의 식견이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러일전쟁마저 이겨 기세등등한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황제가 빠진 상태에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본 군인과 경찰로 둘러 쌓인 대신들을 강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며 이 때 일본의 요구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에 응한 대신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진다는 조약에 찬성한 사람들은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5적이며,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조약에 반대했다. 법부대신 이하영은 처음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을사늑약 이후 장지연의 황성신문 사설발표, 민영환의 할복자결로 이어지며 의식있는 선각자들은 울분을 토하게 되고 열사는 이런 상황에서도 교육운동과 법치운동의 중심에서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고 청년들에게 민족과 나라를 위해 공부할 것을 주장했으며 구국운동, 계몽, 강연, 토론활동, 청년운동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법안연구회도 가동하여 법정과 법령의 안건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제대로 운영되는 걸 도모했으며 헌정연구회로 조직했다.  차라리 기득권 세력의 의견이 약했더라면 저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은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은 사람이 되어 대한제국을 부강하고 1등 민주국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로 보인다.

 

일본에게 진 빚(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온나라가 일어나 국채보상운동을 벌일 때도 적극동참하며 1906년(48세)에는 평리원(오늘날 법원)에서 검사생활을 하게 된다. 고종이 황태자 결혼을 맞이하여 특별사면 대상자를 이준 검사에게 추천하라고 했을 때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되어 복역중이던 정치범들을 사면하자고 했으나 상관들은 다른 중죄인들은 사면하자고 하여 고종에게 보고했다. 이에 상관 형사국장을 고소하기에 이르지만 하관이 상관을 고소했다는 항명죄목으로 오히려 구속되고... 곧 석방되었으며 다른 상관들을 고소하게 되며 또 처벌을 받게 된다. 

 

열사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할 때 한국혼에 대해서 강조했다고 한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이고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 라고 질문하고... 열사는 혼이 있으면 살아 있고 혼이 떠난 때를 죽은것이라고 정의한다. 젊은 사람들을 만나 교육할 때마다 이 한국혼에 대해 교육했건만 2천만 대부분의 동포들은 이런 것보다는 눈앞에 닥친 생활고를 걱정하며 사회와 나라 문제는 그 뒷전일 수 밖에 없다. 지금이 그 때보다 물질적으로 수 천배 잘 사는 시대인데도 관심도가 떨어지기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1905년에 체결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이 대한제국을 옥죄어 오자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황제는 일본 몰래 특사 3명을 뽑아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를 보내게 되는데 고종황제가 일찌기 이준 열사의 강인함과 인물된을 알아보고 특사로 보내게 된다. 최후의 만찬과도 같은 젊은이들과 마지막 토론... 부산항... 블라디보스톡항...유럽으로 향하는 시베리어 노선의 열차 ... 2달동안 머나먼 여정끝에 헤이그 드용호텔에 도착...

일본의 불법행위을 만국평화회의 의제로 삼아줄 것을 요구하고 황제의 친서도 전달하는데... 일본의 사주가 이미 여기까지 작용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허를 찔린 일본의 반응은 일사불란하게 이들 3인방 (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의 활동을 방해하고 일제의 격노는 극에 달했다.

일본은 세 사람은 대표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허위전문을 내세우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국제회의 대표들을 회유하게 되는데 ...

열사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회의장에서 칼을 빼 할복을 감행하고 ..쇼킹한 상황으로 열사와 대한제국의 진실성을 세계에 알린다.

일본은 여기서도 이준 열사가 병으로 죽었다고 허위 국제여론을 조성하고... 한국과 일본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열사의 헤이그 사건이 고종황제 퇴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며 허울뿐인 순종황제가 즉위하여 1910년까지 3년 제위 후 1910년 한국과 일본은 합병이 된다.   이후 1945년까지 36년동안 수 많은 독립 운동이 일어나고... 2차대전 때 일본은 세력을 전세계로 확장하려다 미국에게 원자폭탄 2 개를 얻어 맞고... 조선/대한제국 (한반도)에서 전체 군인과 이민자들을 철수하게 된다.

 

변화의 격동기에 지도자 및 지도층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일치된 지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자 역사적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기득권 세력과 새로운 진보세력이 부딛쳤을 때 상생하는 의견, 즉 조화로운 의견을 도출하지 못하고 상대방 의견의 내용보다는 기세싸움에서 지지않으려고 서로가 서로를 죽일려고 악성적으로 싸우는 모습은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이 중요한 시기에 어부지리를 노리는 자가 항상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일성 이준 열사와 같은 사람들의 의견이 시간이 한 참 흐른 지금보다는

당시에 전체 의사결정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천운이 작용했더라면 

우리나라도 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고 독자적으로 정치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처럼 

새로운 독립국가와 번영된 민주국가를 100년 전에 건설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하며

열사의 삶은 누가 뭐라고 해도 뛰어난 선구자요...법학자, 교육계몽운동가이자 민족의 횟불이었다.

후세를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열사의 삶을 재조명하고 조금씩이나 본받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가 더욱 부강하고 더욱 민주적인 나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